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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집
공지
길을 걸으며 생각하는 길 /김태희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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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생각하는 길 /김태희
가을 길을 걷고 있다. 삼남대로의 옛길을 따라 서울에서 강진까지 남쪽으로 가고 있다. 혹은 버스로, 혹은 걸어서 가고 있다. 아직 붉은빛이 덜 들었지만, 청명한 날씨가 걷기에 좋았다. 들판에 벼가 노랗고, 언덕에 억새가 바람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고, 담장 위에 감들이 빨갛다.

삼남대로는 한양 숭례문(남대문)을 나서 남하하여 강진·해남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9대 또는 10대 간선로 가운데 하나였다. 삼남대로는 호남·충청 지역의 선비들이 과거보러 올라가는 길이었고, 송시열, 정약용 등이 유배지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또 춘향전에서 어사 이몽룡이 암행하여 내려오던 길이었다.
 
길은 여럿이요, 변하고 통한다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면 생긴다. 이 점에서 길은 인문이다. 옛글에서 천(天)·지(地)·인(人)에 상응하여 천문(天文)·지문(地文)·인문(人文)이란 용어를 썼다. 문(文)은 무늬라, 천문은 일월(日月)·성신(星辰), 지문은 산천(山川)·초목(草木), 인문은 시서(詩書)·예악(禮樂)을 가리켰다. 산천초목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녀 만들어진 길은 지문에 새겨진 인문이라 할 수 있다.

옛 지도를 보면 꾸불꾸불 뻗은 굵은 선의 산맥이 먼저 눈에 띄고 그 사이로 흐르는 곡선의 하천이 있다. 지문이라 할 수 있다. 그 위에 그물처럼 직선으로 뻗은 선이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산맥·하천과 구별하기 위해 직선이다. 직선은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면서 눈금으로 거리를 알려줄 뿐, 길의 모양까지 상세히 보여주진 않는다. 눈금이 촘촘하면 길이 구불구불하거나 가파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은 변한다. 전통시대에도 길은 변했지만, 근현대 들어 길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근대에 포장된 신작로가 나고, 현대에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옛길은 밀려났다. 삼남대로 옛길을 찾아 걷다 보니, 옛길은 새 길로 변모하거나 새 길 옆 작은 길로 이용되거나 이용되지 않아 버려지기도 했다. 골프장이나 아파트, 호수에 막혀서 끊어지기도 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새 길에 밀렸던 옛길이 오늘날 걷기 코스로 주목을 받고 있다.

걷는 길에서 눈에 띄는 것이 ‘삼남길’이란 표지였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에 근거하여 정한 도보 여행길이다. 표지는 아름다운 도보여행(대표 손성일) 회원들이 붙여 놓은 것이다. 삼남대로 옛길을 조사하여 옛길을 살리되 걷기 불편한 구간은 근방의 걷기 적합한 길로 대체한 것이 삼남길이다. 전남, 경기 구간에 이어, 앞으로 전북 구간만 마치면 전 구간이 이어진다. 이 단체는 코오롱스포츠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도보여행 카페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연 길과 걷기가 대유행이었다.

길은 여럿이다. 전통시대에도 길은 꼭 하나만이 아니었다. 고갯길에는 평탄하게 돌아가는 길과 가파르지만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 사람에 따라 달리 이용되었다. 현대에도 명절날 고속도로가 막히면 우회도가 있듯이 길은 여럿이다. 충남에서 전북으로 넘는 차령고개길, 또 전북에서 전남으로 넘는 갈재길 구간에서는 산을 넘는 길에서 포장된 국도와 터널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와 기찻길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걷던 옛길, 근대의 포장도로, 현대의 고속도로가 공존했다. 이제 속도 일변도의 길에서 벗어나 옛길과 새 길은 각자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가 되었다.

길을 걷다 보니, 그동안 빠른 속도로 지나쳤던 지역의 모습이 다시 보인다. 전라북도 지역에선 여러 종교의 포교활동이 유난히 활발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지역 농민들 삶이 더 팍팍해서 그랬을까. 평야지대의 특성상 길이 잘 통했던 것도 원인이 아니었을까.
 
도보 여행자가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세상

길은 통(通) 한다. 경계를 넘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것이 길이다. 평야 지대에서는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는 길이 쉽게 만들어진다. 산과 강이 가로막혀 있어도 길은 통한다. 고갯길을 넘어, 나루터를 지나 연결된다. 문제는 인위적으로 끊긴 길이다. 조선시대 중국으로 향했던 의주로, 금강산 구경하러 가던 길이었던 경흥로는 끊겨 있다.

사라진 듯한 옛길도 새 길 속에 살아있거나, 시대가 바뀌어 새롭게 부활하기도 한다. 언젠가 의주로, 경흥로도 통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도보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파리까지 다니면서 각지의 정거장을 거점으로 도보 여행을 즐기겠지. 아예 걸어서 부산에서 런던까지 가는 도보 여행자도 있겠다. 도보 여행자가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세상!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리라.

글쓴이/ 김태희

* 위 글은 다산연구소 실학산책에 실린 글로,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옛길걷기 인문학' 참가에 따른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