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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최정례 글] 김영승 …… 그는 놀라운 투시력과 시적 재질(才質)을 지녔으면서도 ... 우리 시대의 백수다
2017.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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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최정례 글] 김영승 …… 그는 놀라운 투시력과 시적 재질(才質)을 지녔으면서도 ... 우리 시대의 백수다

[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김영승 …… 그는 놀라운 투시력과 시적 재질(才質)

지녔으면서도 모든 경제적, 이념적, 제도적 풍요로부터

소외당한 채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백수다.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김영승, <반성 743>최정례 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239쪽에서]

 

 

 

 

 

반성 743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 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 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이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