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링크
본문
[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김영승 …… 그는 놀라운 투시력과 시적 재질(才質)을
지녔으면서도 모든 경제적, 이념적, 제도적 풍요로부터
소외당한 채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백수다.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김영승, <반성 743>|최정례 ‘발로 눌러 꺼 버린 시인’ 239쪽에서]
반성 743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 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 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이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